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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 개요
갤러리비원은 오는 12월10일부터 12월 16일까지 전인아 개인전 “몽니아인”을 개최한다. 전인아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손녀로 서울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이다. 2014몽니아인/천마 시리즈에서는 말이 기상이 부각되어지며 자연과 ‘신화’, 현재의 이어짐이 주제가 된다. 이는 2007년부터 주제로 삼아온 생성의 근원 매트릭스의 유동성과 연결되어 진다. 작가의 심상을 나타내기도 하는 신화적 조형물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조력자의 상징물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신화 속 이야기인 ‘몽니아인’은 조형물과 더불어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관한 Art Film이며, 매트릭스의 생성의 움직임을 다른 측면에서 극대화하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다. 평면 작업의 지우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투명하게 축적된 흔적들은 이미 쓰여진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쓴 양피지와 유사하다. 여러 번의 가필과 수정, 삭제를 거치면서 작업에서는 다양한 시점과 공간감이 형성된다. 화면의 환상적 요소는 그리고 다시 지움을 반복하는 작업의 다양한 흔적의 결과이며 구체적 형상인 ‘말’, ‘새’와 같은 신화소 들과 배경과 대상을 융화 시키는 색상의 여백의 조율은 작업의 근간이 된다. 특히 다양한 질감과 톤을 사용한 ‘흰색’의 쓰임은 대상을 지우는 동시에 재탄생 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상에서는 형태의 분명함을 추구하여 평면작업간의 차별화를 시도 했다. 몽니아인(蒙泥아인) 몽니정관(蒙泥靜觀)뒹구는 것을 바라보다 늦봄 버드나무의 잎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가운데 말들이 노니는 모습을 표현한 글이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말과 이를 바라보는 다른 말을 의미한다. 말 그림은 본래 한국의 사대부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으로 많이 그려왔다.
I. 신화 Mytholgy and Culture
신라시대의 천마도는 말을 형상화한 것으로 자작나무 껍질에 채색을 한 한국의 남부 경주에 위치한 고분 ‘천마총’에서 출토된 한국의 국보 207호이다. 한국의 5세기말은 세 나라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문화적 특징을 지닌다. 천마도의 말의 형상은 당시의 신라의 기상을 나타내며 인동 덩굴무늬의 섬세함은 여성적 포용력을 의미한다. 전체주제: 작업 전체주제인 움직임의 근원으로서의 Matrix를 바탕으로 ‘움직임’을 시각화하는 방안으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신화의 영역을 ‘움직임’을 빌어 표현하려 한다.
II. 전시 형태
‘몽니아인’은 ART FILM으로 동시에 제작될 예정이다. 이는 3분간의 동영상 FILM으로 전인아의 드로잉작업을 SIDE-EFFECT기법으로 처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시도한다. ‘천마’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한국전통의 신화의 매개체이다. 작가가 2010년경부터 모티브로 삼아온 근원적 생성의 ‘움직임’을 캔바스를 탈피하여 Frame by Frame으로 만들었다. 특히 과거 한국의 신화 중 신라의 문화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부조물’ 위에 ‘몽니아인’의 움직이는 이미지를 투사하여 환영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려 한다. 음향에서는 시간성을 초월한 ‘물아일체’의 감성을 살리려 한다. 천마총 부조물… projection 쏘는 배경(약 110x90cm), art film'몽니아인‘상영, 그리고 전통적 매체인 한지를 사용한 평면적업을 배치하여 매체간의 상호 상승효과를 의도하였다.
III. 전시기획 의도
신화 속에 존재하는 말의 기상이나 이야기의 흐름, 새의 움직임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이는 과거의 신화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무의식을 현재에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기존 본인 작업에서의 정적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역동적 이미지로 크로스-오버 된다. 작가에게 천마도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여성들의 ‘베짜기’와 같은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정신적인 면의 이어감이다. 무의식에 잠재된 친숙함이나 노력은 숨김과 감춤의 미덕이기도 하다. 천마도의 부조물은 역사적 조형물의 재해석이며 재질과 색상의 변화로 과거의 개념에서 나아가 신화적 재해석을 시도했다. 작업의 소재인 천마 ‘몽니’의 모습에는 작가의 자아가 투영되며 혼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과정이 반영된다. 2007년부터 지속해온 매트릭스의 움직임의 연장은 매체의 변환을 통해서도 지속되어진다. 100여장의 드로잉의 변화에 의해 평범한 말이 천마로 거듭나는 모습이 Art Film 영상을 통해 재현된다. 내적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친화적 사고이며 ‘신화’의 재해석이다. <2013 매트릭스 시리즈>는 새의 움직임을 주제로 자유로움과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세포처럼 쉼 없이 움직이며 그 생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전인아의 작업은, 생물 형태적인 외양을 지닌다. 때로는 인체의 부분이나 다른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은 생물 형태적 추상에 가깝다. 전인아가 2007년부터 주제로 삼아온 매트릭스는 생성의 근원이나 발생지를 의미하며 작업마다 등장하는 인체, 새, 물고기, 껍질의 형상은 매트릭스의 은유이다. 전인아는 친숙한 대상인 자연물을 가시화해 화면에서 조화를 이루고 확산시켜 개개의 작업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고자 한다.
heavenly horse-3, 90 x 160cm, plaster, 2014
heavenly horse-7, 50 x 40cm, mixed media on paper, 2014
mongni-8, 33 x 41cm, mixed media on paper, 2014
mongni-11, 32 x 41cm, mixed media on paper, 2014
mongni-17, 72 x 103.5cm, mixed media on paper, 2014
wing, 70 x 51cm, mixed media on paper, 2014
wing-2, 53 x 46cm, mixed media on paper, 2014
Unexpected Space II
16mm영화필름으로 같은 장소를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촬영을 하여 작업을 하는 박승훈은 필름을 엮는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변형을 통해 사적인 기억과 기록을 이야기하려 한다. 과거 아련한 기억 속 대상은 여러 시공간으로 다시 촬영되어 엮이고 대상과 기억이 서로 간섭, 새로운 노스탈지를 느끼게 한다.
TEXTUS 053-1_Digital C Print_93cmx161cm_2011
TEXTUS 072_Digital C Print_100cmx125cm_2011
TEXTUS 076-1_Digital C Print_93cmx153cm_2011
TEXTUS 122-1_Digital C Print_120cmx150cm_2013
TEXTUS 133_Digital C Print_120cmx150cm_2013
TEXTUS 201-1 Wall Street 1_Digital C Print_153cmx120cm_2014
TEXTUS 203-1 Grand Central 1_Digital C Print_150cmx120cm_2014
TEXTUS 204 in front of the dakota_Digital C Print_150cmx120cm_2014
TEXTUS 206 NY Public Library 1_Digital C Print_150cmx120cm_2014
고독과 외로움 사이에서의 부유
작가 최선주의 작품들을 접하며 동시대미술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자면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가장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감정일진대 작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하는 고독이랄지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네 삶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고독이란 얼마나 할 이야기도 많고 그 갈래도 무수히 많은지 그녀의 작품제작 과정을 들으며 떠올렸던 나의 단상이다. 그 감정에 대한 것을 작품으로 녹여내고자 하는 작가 최선주의 화폭에는 옛날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소품(오르골, 구두, 향수병, 나무, 의자, 꽃, 거울, 창문, 새장, TV등)들이 오브제처럼 등장하고 그러한 효과를 질감으로 구체화하기 위하여 캔버스위에 금강석 가루를 먼저 입히는 것으로 작업은 시작된다. 그 위에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출력하고 덧붙이면서 그래픽작업을 거쳐 마지막 작가의 손으로 이루어내는 섬세한 터치까지 제법 많은 두께들을 얹어내는 그녀의 작품을 보자면 우리가 물성이나 재료의 관점에서 읽고자 하는 실험적인 태도를 논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생각이나 고민이 더욱 궁금해지는 듯하다.
또한 단순히 1차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회화에서 논의되어질 법한 색채, 오브제, 그 다양한 오브제들을 감싸는 뒷배경 등은 어쩌면 그녀가 이야기하고 천착하는 ‘고독’ 에 대한 수많은 단상과 그 갈래들 인지도 모른다. 가령 그녀의 작품 중 대화시리즈가 더욱 그러한 색깔이 짙어 보이는 건 아름다운 정원을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꽃들 앞으로 오르골을 연상시키는 인형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고,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투명한 병이 인형들에 씌워져 있다. 왼편 인형은 발 아래쪽이 열린 형태로 씌워져 있으며 오른편 인형은 머리 위쪽이 열려 있는 투명한 유리병이 씌워져 있다. 이런 모습이 마치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이 대화를 시도하며 마주보는 구도이지만 소통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느끼지도 열리지도 않는 답답하고도 서글픈 소통 부재의 현실을 화면에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처연하고 서글픔이 묻어나는 삶의 순간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의 가장 최근작 중 <꽃밭>, <대화>, <겨울 이야기>는 이러한 맥락들을 동일하게 담고 있는 시리즈라 여겨지는 반면, <외출>은 거울과 구두, 향수병이 화면에 눈의 띄는 구조로 여성이라면 누구나 꿈꾸어 보는, 일상에서의 일탈, 어쩌면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구와는 달리 늘 제자리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삶의 ‘외로움’ 이 느껴진다. 거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슴 두 마리 또한 그녀가 진실로 소망하는 그런 모습의 투영이 아닐까. 혹은 이미 결정되어 버려 변화가 힘들게만 느껴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생각> 시리즈는 위에서 언급했던 그녀의 작업과정-질감의 두께-를 가장 고스란히 날것의 상태로 드러내 주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화면의 중앙에 위치해 작품을 감상하게 될 이들을 응시하는 한 마리의 사슴은 마치 겨울의 풍경이 느껴지는 화면 가득 채워진 흰 배경 속에 오롯이 들어가 있어 그를 바라보는 이와 서로 어떠한 소통을 원하고 있는지 의아함을 자아낸다. 마치 <대화> 시리즈가 한 화면 안에 두 개의 인형이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는 장면을 응시하게 만들었다면 <생각>시리즈는 외려 ‘소통의 가능성이 조금은 더 열린 상태’를 말하는 것만 같다. 작가 최선주의 이전 작업들, <겨울 이야기>, <거울 속 집>, <Deer hunting-Reflection> 시리즈를 관통하였던 주제와 의미도 인간의 원초적인 외로움, 고독일진대 다시 4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 최선주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작가자신의 세계에 더욱 깊이 집중하고 성찰하는 시간,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을 더욱 극대화 시켜줄 수 있는 화면의 구도, 색감, 매체의 혼합 등이 기법 면에서 한층 다듬어진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의 삶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 그에 충실 하고픈 작가의 소망과 열망이 작품 안의 깊이와 의미를 더하며 감상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어린 시절 낡은, 그러나 아련한 추억들을 꺼내고 싶은 순수함이 남아 있던 상태로 돌아가고픈 혹은 돌아가 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도 생각하게 하는, 작가가 건네는 ‘대화’ 에 다시금 눈과 마음을 열고 싶어진다.
경기창작센터 학예연구사
김 현 정
생각05, 90 x 60.6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생각07, 90 x 60.6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생각05-1, 162 x 130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꽃밭02, 162 x 130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대화02, 116.8 x 72.7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in bottle02, 72.7 x 60.6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꽃밭01, 72.7 x 116.8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겨울이야기02, 90.9 x 65.1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외출02, 90 x 77.5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거울속집02, 90.9 x 65.1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in bottle01, 72.7 x 60.6 cm, mixed media on canvas, 2014
소리 없이 들리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싸고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에 서있다. 이 한 자리마저도 불어난 몸집 때문에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이 구획한 경계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사지가 나가떨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웅크리거나 서서히 자라야 한다. 도시 속 우리는 그들의 손을 통해 안정적인 듯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위태롭고 힘들게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회색빛 도시에 초록의 상징과 희생만을 강요한다. 이제 우리는 그늘진 어두운 도시를 떠나 빛의 무지개를 찾아 나서려 한다.
몸을 띄어 내려 보니 공기가 내 발 밑이다. 가벼운 마음이 다른 이를 생각하게하고 같은 숨을 함께한다. 이에 한 숨, 한 숨, 내뱉는 소리 없는 웅성임이 하나가 되고 또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큰 숨을 내쉰다. 다시금 몸을 띄어 내려 보니 나는 공기처럼 가볍다. 하늘을 가득 메운 우리는 현재를 지워내고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간다. 빛마저 잃어버린 땅에 공허한 현실을 감추듯 내려 앉아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생명은 서로를 이해하듯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 됨을 알린다. 인간이 현실 삶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듯 우리 또한 통제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을 찾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노스텔지어를 상상하며 어딘가에 있을 이상향으로 향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풍경은 비로써 지워지고 최소한의 색으로 남아 버린다. 모든 것이 흘러내리고 지워지며 결국 남겨진 것들은 파스텔 톤의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린다.
무지개 끝 어딘가에는 빛으로 가득한 눈부신 작은 태양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빛 잃은 무지개 끝엔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갈 곳 잃은 생명들이 함께할 것이다. 이젠 소리 없이 들리는 작은 감정들과 먼지가 된 빛 잃은 생명들이 빛을 찾아 끝을 찾아 스스로 떠나야만 한다.
조태광
지워져도 채워져도(red), 116.8 x 91.0 cm, acrylic on linen, 2014
지워져도 채워져도(yellow), 116.8 x 91.0, acrylic on linen, 2014
지워져도 채워져도(blue), 116.8 x 91.0, acrylic on linen, 2014
무지개 끝 어딘가에, 112.1 x 162.2 cm, acrylic on linen, 2014
무지개 끝 어딘가에, 112.1 x 162.2 cm, acrylic on linen, 2014
공기처럼 가벼이, 130.3 x 130.3 cm, acrylic on linen, 2014
떠도는 섬, 25 x 25 cm, acrylic on linen, 2014
최수진의 회화
부유하는, 생성하는, 이행하는 의미들
랭보는 말이 원래의 지시적 의미를 잃고, 흐르는 구름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시의 본성을 겨냥한 말이며, 시의 극단을 조준한 말이다. 시가 다만 개인적인 층위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시가 극단적인 형식에 이르렀을 때, 말하자면 시가 가장 개인적인 층위에 머물렀을 때, 그래서 시가 가장 순수해질 때, 시는 의미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 순수한 언어유희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그렇게 시는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멈추고, 불통을 증언하는 것으로 열린다. 소통을 위해 언어가 필요하지만, 더 잘 더 많이 더 섬세하게 언어를 사용할수록 오히려 불통의 딜레마에 빠진다. 시의 아이러니고 언어의 역설이다. 아니, 엄밀하게는 언어가 아닌 언어용법의 패러독스다. 그렇게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 가닿지도 너를 맞추지도 못한다. 언제나 어슷비슷한 의미들로 어긋나고 빗나갈 뿐. 흐르는 구름이 꼭 그렇다. 이거지 싶어 보면 어느새 저것이고 저거지 싶다가도 불현듯 이것인 게 구름의 형상이다. 구름의 형상은 말하자면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형상이다. 누가 구름의 결정적인 형상을 붙잡을 수가 있는가. 구름이 그렇고 의미가 그렇다.
이행중인 형상과 마찬가지로 이행중인 의미에 대해선 랭보와 함께 자크 데리다의 차연과 산종이론이 의미심장하다. 하나의 의미란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계속 미끄러질 뿐 궁극적인 의미, 최종적인 의미, 결정적인 의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의미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도 같고, 다른 의미들을 불러들이는 의미들의 끝도 없는 연쇄와도 같다. 랭보와 데리다가 시와 언어의 현상적(어쩌면 한계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면, 질 들뢰즈의 00되기는 언어를 이행중인 언어로 사용하는 언어용법에 대해서, 언어를 실천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있다. 언어를 그리고 의미를 고정하고 결정화하려는 제도의 기획(어쩜 관성)에 대해서 언어 고유의 다의성(어쩌면 탈언어적인 성질과 함께 그 자체 시의 본성이기도 한)을 구제해내려는 실천이며 방법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에 있다. 안 봐도 비디오인 결정적인 의미, 고정적인 의미체계를 흔들어 어떻게 언어며 의미의 다의성을 회복할 것인가, 에 있다. 최수진의 그림은 이런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고, 그래서 의미가 있다.
최수진은 그림의 주제를 <알레고리의 숲-불안의 노래>(2011년 개인전)며, <호기심, 구름, 단어>(2010년 개인전)로 명명한다. 알다시피 상징과 알레고리는 이차적인 언어다. 차이가 있다면, 상징의 지시적 의미가 어느 정도 결정적이라면, 그래서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면, 알레고리의 지시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비결정적이고 열려있다. 상징들이 모여 하나의 혹은 복수의 서사를 파생시키는 이야기의 기술로, 의미가 의미를 불러들여 밑도 끝도 없는 의미들의 연쇄를 파생시키는 의미의 기술로 알레고리를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런 알레고리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의 숲이란 실재하는 숲을 의미하기보다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서사며 의미들의 연쇄가 발생하고 파생되는 장을 의미하고, 어쩌면 하이퍼텍스트와도 같은 상황논리의 제안 내지는 마치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에서처럼 작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숲이 불안의 노래를 부른다. 아님 내뱉는다. 왜 불안인가. 여기서 불안은 무슨 의미인가. 말과 말들이 그 지시적 의미를 잃고 부유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의미와 의미들이 정박하지 못한 채 뜬구름처럼 흐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러므로 그 불안은 실존적 의미로서보다는 이행하는 의미들이며 파생되는 서사들에 연유한 언어유희의 한 성질내지는 이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불안에 실존적 의미가 없지는 않다. 유년시절에 작가는 꽤 오랫동안 천식을 앓았다. 천식은 알다시피 숨을 잘 못 쉬는 증상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증상이 작가의 그림에 남다른 징후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온통 숨에 민감한 탓에 세상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점차 천식에서 회복되면서(거의 사춘기 즈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보아지고 들리는 세상은 마치 처음으로 보고 듣는 듯 했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현상학적 에포케며 의식의 영도지점을 저절로 선취한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래서 호기심이고 구름이고 단어다. 세상을 온통 처음 보는 것 같았고, 이미 정박된 의미며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적어도 작가에게 정박된 의미가 같은 건 없었으므로), 마치 흐르는 구름처럼 의미며 단어들을 흐르게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엔 유독 공기와 안개와 구름 같은 허물 허물한 것들이 많고, 숨을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공기텐트, 안개그물침대, 안개 탕, 구름더미의 숲, 구름철망, 공기돌탑, 공기대화, 야간먼지집회, 먼지괴물, 먼지부엉이와 같은. 그림에서 공기와 안개와 구름은 사물과 현상의 고정된 의미를 흔들어 흐르게 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 서로 침투 내지 침윤되게 하고, 이로써 의미세계를 재편하게 한다. 이를테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버섯이 혀를 내밀어 옆에 있는 다른 버섯의 머리를 핥는 것과 같은. 만화적인, 공상적인, 초현실적인, 자동 기술적이고 자유연상적인, 하이퍼텍스트적인, 마치 농담과도 같은 상상력으로 의미로 구조화된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대전과학엑스포의 마스코트 꿈돌이가,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면서 얻게 된 각종 민속인형들이, 성모 마리아 내지는 불두 내지는 뱀을 호리는 여인과 같은 성상 이미지가, 미니어처 목마가,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아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견장과 같은 추상적 기호가, 만화와 같은 말풍선이, 유기적인 붓질과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기호가, 형상과 추상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공존하는 아님 상호 스며들고 침투되는 친근하면서 의외의 어떤 차원이 열린다. 알만한 모티브들이 그림을 친근하게 한다면, 그 알만한 모티브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방식이 의외의 비전을 열어 놓는다.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의미들이며 파생되는 의미들로 의미세계를 재부팅한다고나 할까.
여기에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는 다중그림이 더해진다. 소설로 치자면 액자소설에 해당하겠다. 이를테면 구름이 흐르고 철망이 있는, 그 위에 이러저런 모티브들이 얹혀 있는 보통의 숲 그림이 겉 그림이라고 한다면, 나무의 옹이처럼 아님 혹처럼 표면으로 돌출돼 보이는 사람 얼굴이, 넓적한 돌 위에 펼쳐진, 미니어처 집을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풍경이, 그리고 여기에 용을 퇴치하고 공주를 구출하는 신화 속 테마를 변주한 정경이 속 그림에 해당한다. 큰 그림 속에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작은 그림들이 중첩된,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내포된 결정적인 의미를 비결정적으로 열어놓는,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야기들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놓는, 그렇게 이야기들 스스로 의미를 파생시키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연쇄가 전개된다. 마치 이야기가 멈춘 순간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천일야화에서도 같은, 아님 생각이 생각을 물고 기억과 현실인식의 경계가 넘나들어지는 의식의 흐름에서와도 같은 상황논리며 논리의 비약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최수진의 그림에서 숨은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이다. 작가의 숨을 못 쉬는 경험은 숨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감적인 이해와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내 체온을 거쳐나간 공기가 외부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공중에 뜨는 것을 감지할 정도로. 숨이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이 거의 감지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고, 그런 만큼 작가만의 남다른 아이덴티티며 멘탈리티를 형성시켜준 계기이며 사건으로 봐도 되겠다. 살아가다 보면 숨 막히는 현실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모처럼 숨의 실체를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작가는 그렇게 숨의 실체가 또렷해지는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몰입을 그린다. 문제는 이처럼 또렷해진 숨 속에 모든 것들이 녹아든다는 것이다. 숲도, 나무도, 하늘도, 사람도, 원래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모든 것들이 숨 속에 녹아들면서 흐물흐물해지고 경계가 지워져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화해진다. 마치 존재며 세계 전체가 희부옇게 흔들리는 한갓 공기소(素)로 변질된다고나 할까. 작가는 그런 아니마(영기)로 충만한 세계를 그리고, 불안(아님 위로?)과 몽상이, 서사와 비전(아님 일루전?)이, 이야기의 기술과 의미의 기술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세계를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감각적인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조화되고 재부팅되는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상상계?)를 그려놓고 있었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공기 텐트, 182 x 227 cm, oil on canvas, 2013
만취풍덩, 130 x 130 cm, oil on canvas, 2013
저녁산책, 130 x 130 cm, oil on canvas, 2013
어느 추운날, 227 x 182 cm, oil on canvas, 2013
야간먼지집회, 91 x 91 cm, oil on canvas, 2013
캠핑소녀, 117 x 73 cm, oil on canvas, 2013
검은 연못, 53 x 33 cm, oil on canvas, 2013
말못하는 오리, 50 x 50 cm, oil on canvas, 2013
무화과, 22 x 27 cm, oil on canvas, 2012
밤꽃밭, 53 x 41 cm, oil on canvas, 2013
옹기종기, 60 x 60 cm, oil on canvas, 2013
A sad story_Oil on canvas_ 194 x 130.3 cm_ 2014
What do you think?_Oil on canvas_ 162 x 112 cm_ 2014
History of silence_Oil on canvas_ 162 x 130.3 cm_ 2014
In the air, too._Oil on canvas_ 65 x 130 cm_ 2014
That's the way it goes,that's life._ Oil on canvas_72.7 x 91 cm_ 2014
I'll rather do that._ 92 x 72.7 cm_ 2014
Would it be possible for artists to ‘reproduce’ the operation system and the structure of modern capitalism? Could this reproduction unfold the causal chain effect influencing the nation, the enterprise and household? Could this chain effect be surfaced with the flow of capital dashing, slipping, leaning and dispersing like a ghost in the name of electronic information through the complex network on a global level as it watches the flow and its decision making process? Could art do what social science cannot? This isn’t the right question to ask to begin with. Artists are not even interested in recreating the system precisely and accurately. They just regard capitalism as a problematic phenomenon stirring up their imagination. In short, they don’t criticize capitalism through intelligent reflection and examination. Artists create their intelligent understanding of capitalism in a form of emotional stimulation during their operating process, whether it should be excitement, disillusion, or sadness.
How do they do that then?
The interest in capitalism and the methodical approach of collage are found in Ilyong Shin’s
Ilyong Shin’s series pieces are composed of various arrangement and combination of these components. What sets apart from collage in the past is that his work is produced by computers. The difference is not trivial. The analogue collage is to recombine the actual images borrowed from somewhere else whereas the digital collage is to combine them by inventing and manipulating. The images of eyes and hairs of the significant insects in Shin’s work are seen as if they were reproduced to show their photographic realism. The dollar bills and coins are represented the same way. Additionally, although his work is a flat operation, it provides three-dimensional hallucinating effect different from the collage in a world of analogue. These components are arranged in a relatively stable structure dynamically in three dimensions. So the series of his work look as though they were captured from several scenes in 3D animated films. For example, the credit card in his series is a theater; the dollar bill is a stage; and the insects are characters of a potentially producible animated film. The fiction these components create is obviously the fiction of capitalism. The system has not only made humans subordinate to drive called desire and dynamics called competition but also degraded their existence into the animal status. It is the unbalanced fiction of the system where someone always reigns as someone else is always exploited. However, similar to some collage art work in earlier years, his point of fiction in his pieces is extremely simple. In fact, there is nothing new about this at all. It is very conventional. What is important here is not how the fiction is elaborate and fresh but how the fiction both as an object and a dynamic, elaborate and captivating image is presented to audience. Particularly, Mr. Shin exhibits these series of images on aluminum panels of which frames are gold-plated. Thus, it is possible to own his pieces which would become spectacular objects in your art collection. They are not just some art pieces we must appreciate from a distance. They provoke not only visual pleasure but also desire of ownership. What is interesting here is that his series of work can be seen as fragments of animated films or their venues although each piece of his work is independent and individually created. The audience would feel as if they are watching parts of an animated film shown at a movie theater, and they would imagine the rest of the film should be hidden somewhere. The most fascinating idiosyncrasy of Shin’s digital work this time in my mind is that he has made something impossible to possess possible; or he at least provides his audience with a dream of owning one or two of his art creation. These series appear before the audience as a partial imaginary of a whole film, an art work, a space and a fragment. They incite both satisfiable and unsatisfiable desire by exposing some and hiding others. Ilyong Shin’s work can be appreciated and purchased individually, but at the same time we may appreciate his art work as both existent and nonexistent objects in relation to objects uncollectible but tempting. And this probably shows the human-animal desire living in the system of modern capitalism. From past to future, from inside the computer to outside, from inside the exhibit venue to outside, I anticipate that some parts of the database from his art work will infinitely manifest. Moreover, some other types of art work or commodity will be expected to appear from the databas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We live in between existent and nonexistent worlds of animation and collage both imaginably and realistically at the same time. As I look closely at the eyes of insects swarming and fighting to survive in his series art work, I see some compound eyes. How would they see the world with those eyes? They might see it as a collage of countless fragments. The difference in how they see the world compared to us is that they don’t care about what they cannot see. They are not interested in acquiring inadequate desire or eternal hunger. Ergo in this world exist the doomed, but there aren’t such insects.
Poet/Sociologist Bosun Shim
불편한 친근함
쫑긋 세운 두 귀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 총명한 눈매를 따라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털이 잘 발달된 가슴과 다리 근육을 부드럽게 감싸고,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벽채와 값비싼 가구를 배경으로 늠름하게 앉아 있는 자세에는 위용이 넘친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견공들의 화려한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 사진. 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애견의 외양적 특징과 조금씩 다른 견공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의문들이 하나 둘 싹튼다. 일관된 색조로 털이 부드럽게 돋아나 있어야 할 곳에 얼룩덜룩 이질적인 무늬가 갑자기 등장하거나, 초롱초롱한 두 눈동자의 색이 서로 다르거나 얼굴과의 크기비례가 어색하고, 화려한 옷가지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문양과 색상이 얼굴과 귀를 뒤덮고 있는 모습. 주승재가 만들어낸 가상의 견공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친근하면서도 불편한, 낯익음 속에 낯설음이 공존하는 모호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주승재의 작업은 일상의 주변에서 발견한 친근한 소재를 대상화시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의 실체와 그것의 판단기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근에 그는 미국 유학시절 접하게 된 서구식 애견문화 이면에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된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일반적으로 유기견들은 혈통, 외양, 양육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무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 속에 버려지면서 그것의 존재 가치도 서서히 망각된다. 사회 안에서 매 선택의 동인이 되는 가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바람직함’을 뜻하는 가치의 사전적 의미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인간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에서 좋지 않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평가된 유기견들은 작가에 의해 이미지의 형태로 다시 해체, 조합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벽한 조화물로 재탄생한다. 하나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통 열다섯 마리 내외의 유기견 이미지가 사용되는데, 이 때 작가가 바라보는 조형적 미의 기준은 하나의 새로운 견공을 탄생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렇게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알맞은 위치에 적절히 배합된 유기견 이미지는 그 자체로 사회 속에 평가절하되고 의미를 잃어버린 가치들이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집합체인 동시에 정교한 기술과 작가의 통제에 의해 제시된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가 된다. 이것은 좋고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 가치 기준의 정반대편에서 출발하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대변되는 작가의 통제에 의해 다시 하나의 완벽하고 조화로운 형태미를 갖춰나간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이미지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의 원천을 제공한다. 여기에 보호소에서 생활하는 3주간의 시간 동안 주인이나 입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되는 유기견의 운명, 작품의 모델이 된 유기견들 대부분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이제는 만나볼 수 없다는 상황적 요인은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판단의 기준에 선택과 포기, 삶과 죽음과 같은 양립된 가치들을 부가하면서 작품을 대하는 관객에게 복합적인 심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작품을 보면서 친근하면서도 불편하고, 낯익은듯하면서도 낯선 심리적 당혹감을 받게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미지를 통해 연상되는 여러 가치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충돌하고 연합하기를 반복하는 데에서 기인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인간의 상상과 욕망이 빚어낸 다양한 가치들은 견공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 뒤편에 자리한 배경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작가에 의해 새로운 존재가치를 부여받은 가상의 견공들은 자세뿐만 아니라 화려한 배경묘사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환경에서 훈육된 듯한 인상을 준다. 특히 캔버스에 프린트된 후 표면의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질료로 덧칠된 작업들은 과거 시대의 초상화 전통에서 의뢰인의 주문에 따라 견공을 화폭에 등장시킨 대가들의 작품을 상기시키면서 그림 속 견공의 지위를 다시금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유전자 진화의 문제에 기반을 둔 우생학적인 방법은 견종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반면, 그에 반하는 견종들에 대한 가치폄하현상을 야기시켰다. 이것이 주승재의 작업에서는 가치평가의 기준에서 낙오되어 열성인자로 치부된 요소들이 정교한 기술력과 회화적 전통에 의해 가상의 견공이미지로 재조합되면서, 종의 희소적 가치와 지위를 부여받은 셈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가치가 서로 부딪히고 중첩되어 혼재된 상황이 고도의 기술에 의해 실재 같은 가상의 이미지 안에서 정교하게 은폐되는 과정은 현대사회의 여러 국면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다양한 가치들이 사회 공동체 안에서 모순, 대립하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와 고도로 발달된 기술력은 이를 균형있고 조화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작가는
황정인(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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